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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따라 길 따라

[여행스케치] 만석꾼의 집 송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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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소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의 만석꾼이던 송소 심호택이 지은 집으로 심 부잣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처대의 7대손인 심호택은 호는 송소이며 9대에 걸쳐 만석꾼 소리를 들으며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대부호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상류 가옥인 송소고택은 강릉의 선교장, 보은의 선병국 가옥과 함께 "조선의 3대 99칸 집"으로 꼽힙니다. 100칸의 가옥은 조선시대 왕이 거주하는 궁궐을 제외하곤 건축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왕의 권위를 넘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송소고택은 국가 민속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지자체와 심처대의 11대 손인 심재오 씨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청송 심 씨는 전통의 명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조는 심홍부로,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 벼슬을 지낸 분이고 심호택은 그의 7대 후손으로, 거주하던 호박골에서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옮겨오면서 99칸의 저택으로 1880년 경에 건립하였습니다.

 

 

 

 

 

 

 

 

 

포스팅

주산지, 주왕계곡에 이어 송소고택은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입니다. 넓은 99칸 대저택의 후기를 기억하며 써내려 가기가 어렵군요. 나름대로 관련 자료를 뒤적거려 포스팅합니다. 우선 만석꾼이란 막연히 큰 부자로만 아는데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만석꾼 

곡식 만 섬 가량을 거두어들일 만한 논밭을 가진 큰 부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 곡식은 쌀을 말합니다.

한 섬은 약 2 가마니인데 무게로 160kg입니다. 그럼, 만 섬은 톤으로 환산해서 1600톤, 이 정도의 농사를 지으려면 땅 80만 평이 필요하다 합니다. 어마어마하죠? 이는 서울 여의도 면적의 1/3에 해당하는 면적입니다. 농사가 나라의 근본인 당시의 富 기준은 쌀이라 볼 때, 만 섬의 수확량은 조선 최상위급 부자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고약한 부자?

성경에 "부자가 천당에 가려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고약한 부자가 많다는 말 이기도 하지요. 넘치는 곡식으로 기근에 고리로 빌려주어 이듬해 흉년이 되어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아 소작인으로 전락시키죠. 이렇듯 약자 위에서 땅을 넓혀가며 천석꾼, 만석꾼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만석꾼 심부자는 청송 땅 백리 안에 심부자의 땅을 밟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을 만큼  큰 부자였다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심호택은 주변 고을의 어려움을 함께하고, 일제 식민지 하에서는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보내는 등 선행을 많이 한 부자로 알려져 있더군요. 특히 심호택의 아들과 손자였던 상원과 운섭 두 분은 해방 이후 소유한 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이른바 '부의 사회 환원'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로 인해 만석꾼의 역사는 약 250년, 9대에서 막을 내렸다고 전하는군요. 심 부잣집의 선행은 이처럼 오늘날 시사하는 바도 크다 볼 수 있습니다.


하천의 다리를 지나 '청송 심 씨 본향'이라 세워진 덕천 마을 비석에 도착합니다.

 

 

 

 

홍살을 설치한 솟을대문 위에 걸린 현판입니다.

 

 

 

송소세장(松韶世莊) 현판
건물 배치도

 이리 오너라~~!!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 마당에는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이 사랑채에서 눈에 띄지 말라고 헛담을 두었습니다.

 

 

안채가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쌓은 헛담

 

 

안에서 본 중앙 좌, 우측 행랑채(문간채)와 좌측 끝으로 사무실, 세면장 순으로 있습니다. 행랑채는 하인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정원 앞 남쪽으로 정(井) 자 형 우물이 있습니다. 외부 우물로 하인들이 농사와 연관되어 사용하던 우물이라 하네요. 고택에는 총 3개의 우물이 있습니다.

 

 

 

 

정원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였고 우측에 작은 사랑채가 있습니다. 안채는 안사람이 거처하던 곳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지요.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 상류층 주택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사랑채에는 손님의 왕래가 많았던 공간으로 넓은 마루가 거실처럼 사용되었지요.

 

 

 

 

'ㅁ '자형 안채의 작은 마당. 안방마님이 기거하던 공간.

 

 

안채

 

 

송소고택은 숙박체험을 통한 사업으로 고택의 관리비를 충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궁이가 있는 작은 공간을 통해 후원으로 연결됩니다.

 

 

 

 

후원에 쌓아둔 장작

 

 

 

 

후원은 관리가 잘 돼있고 아름다웠습니다.

 

 

 

 

 

안채의 서쪽 공간입니다. 작은 툇마루가 있는 휴식공간입니다.

 

 

 

 

안채 후원에 대나무 숲이 힐링 공간입니다. 

 

 

 

 

안채에서 후원 쪽 아궁이 통로로 나오면 사각 나무판자 굴뚝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시골서 보던 굴뚝입니다.

 

 

 

 

후원 뒷마당에 있는 장독대

 

 

 

 

광(창고)으로 보이는군요

 

 

 

 

무엇을 열심히 보고 계실까요?

 

 

 

 

사랑채와 안채를 가로막고 서 있는 담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그랗게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습니다. 사랑채 쪽에는 6개의 구멍이, 안채 쪽에는 3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사랑채 쪽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안채 쪽의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사랑채 마당을 볼 수 있죠. 이는 안채의 여인들이 사랑채에 온 손님을 확인하기 위한 엿보기 용으로 소통되던 지혜입니다.

 

 

 

 

별채로 통하는 작은 솟을 문입니다. 두 마리의 사자상이 놓여있고 이는 집안의 액운을 물리치고자 놓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별채에서 해설사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해학적인 모습의 항아리

 

별채 내부의 우물

 

 

 

 

 

사무실로 쓰이는 행랑채 앞으로 세면장이 보입니다. 나무 아래 강아지 집 까지 하면 100칸 건물?

 

 

 

 

 

 

강아지 집에는 이 녀석이 살더군요. 송소고택을 지키는 경비견 >ㆍ< 흙장난을 해 꼬질꼬질합니다. ㅎㅎ  아주 착해요

그러고 보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관리소로 쓰이는 방에서 나와 강아지 사료를 주던 분이 고택을 관리하는 심처대 11 대 손 심재오 씨가 아닌가 싶네요. 관리소에 벽에 붙여둔 기사를 읽어보니 심재오 씨는 젊은 시절 이러 저런 이유로 많은 재산을 압류당하고 현재는 송소고택을 지금까지 위탁 관리하고 있다는군요.

 

 

 

 

세면장 옆 화장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으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현대식 화장실로 개축하였다 합니다.

 

 

 

 

나란히 위치한 방앗간채이고 뒤로 보이는 가장 안쪽의 창고 건물은 향사 물품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입구에 고택 분위기의 리빙 카페 백일홍입니다. 배우 공유가 화보 촬영을 한 곳이더군요. 고택의 분위기와 한잔 나눌 수 있도록 운치 있게 인테리어 되어 있습니다.

 

 

 

 

 

송소고택은 외씨버선길이 지나가는 지점입니다.

 

 

 

 

주변의 청송 심 씨 집성촌

 

 

 

 

이른 아침 주산지와 주왕계곡, 만석꾼 심 부잣집의 송소고택을 바삐 돌아보았습니다. 다시 여행 기회가 된다면 고택에서의 하룻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족한 후기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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